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위화도에 도착했지만, 여름 장마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고, 식량은 썩어가고 군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성계는 최영에게 군의 상황을 알리고 다시 한 번 요동 정벌을 포기해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다. 최영은 이성계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제물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위화도에 계속 머물면 병력 손실이 심해지고, 고려로 돌아가면 왕명을 거역한 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깊은 고민 끝에 결국 요동 정벌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성계의 회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함께 정벌에 나섰던 지휘관이 이성계를 찾아와 진정인지 물었다. 이성계는 가족의 희생이 있더라도 요동정벌은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왕의 잘못된 측근을 제거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성계의 결정에 다른 지휘관들도 동의했고, 결국 1388년 5월 22일, 군사들은 회군하여 개경으로 향하게 된다. 이성계의 회군 소식은 고려 전역에 퍼져, 그가 왕의 명령을 어기고 돌아온 반역자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도성의 백성들은 그를 환영하며 길을 열어주었다. 이성계의 인기와 업적은 그를 고려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이성계가 개경에 도착했을 때, 최영과 우왕은 그의 귀환에 놀라 숨게 된다. 그러나 이성계는 곧 최영과 마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눈물을 보며 깊은 감정을 나누었다. 이성계는 최영에게 자신의 본심은 요동 정벌이 아니었으며,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불가피하게 회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최영은 73세의 나이로 이성계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담담하게 유언을 남겼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깊은 유대와 고려 말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성계와 최영의 만남은 고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낸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고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고, 그들의 결단은 결국 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성계는 최영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강한 결심을 하게 되었고, 고려의 부패한 권문세족과의 대결을 결심하게 된다. 최영의 지혜와 용기는 이성계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이들은 함께 고려를 넘어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한 길을 열어갔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고려의 끝과 조선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로 남아 있으며, 이성계의 리더십은 이후 한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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