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의 무덤은 그의 올곧은 성품을 상징하는 장소로, "붉은 무덤"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덤은 한때 풀이 자라지 않아 벌거숭이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다시 풀이 나 있다. 최영은 고려 변방의 무사로서 약 20년간 고려를 위해 싸웠던 충신이었다. 그의 존재는 고려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군사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사건은 고려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위화도 회군에 대한 시선은 다양하다. 첫 번째 시각은 요동정벌이 최영의 함정이었다는 주장이다. 요동정벌이 실패할 경우 이성계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고, 성공하더라도 많은 병사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영의 성품을 고려할 때, 이러한 함정을 의도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시각은 위화도 회군이 이성계의 예정된 계획이었다는 주장이다. 이성계는 이미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6월 1일에 개경 근처에 도착한 후 6월 2일에 가별초가 합류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는 이성계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성계는 고려의 개혁을 간절히 바라던 신진사대부와 함께 권문세족에 의해 빼앗겼던 토지를 백성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은 부정부패를 극복하고 민심을 회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후 이성계는 명나라에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알리며, 1393년 음력 2월 15일에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몽골은 이 시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초강대국이었다. 몽골의 지배자 칭기즈칸은 대륙을 중심으로 영역을 확장하던 중 고려 땅까지 쳐들어온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의문의 살인사건이었는데, 1225년 압록강 강가에서 몽골의 사신 저고요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몽골은 이 사건을 고려의 사신을 죽인 것으로 간주하고 극도로 분노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여몽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이는 고려 역사에서 가장 긴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여몽전쟁은 고려와 몽골 간의 갈등을 상징하며, 고려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전쟁은 고려의 군사적, 정치적 상황을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성계와 최영 같은 인물들이 고려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고려의 끝과 조선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로 남아 있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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