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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과 그 이후: 민주주의 회복과 정치적 변화

그래도 대한민국 2024. 12. 9. 16:22

4.19 혁명과 그 이후: 민주주의 회복과 정치적 변화
1960년대 초반, 한국 사회는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대한 불만으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4.19 혁명의 전개와 그 결과로 나타난 정치적 변화, 그리고 장면 내각의 정책과 사회적 요구를 살펴보겠습니다.

1. 4.19 혁명과 시국 선언
4월 25일, 200여 명의 대학교수들이 시위대를 지지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가두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터에 뿌리려 한다"며, 김주열 학생의 참혹한 시신을 언급하며 이승만 정부의 폭력을 비판했습니다. 교수단의 시국 선언문은 이승만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요구를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대모 학생에게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한 경찰은 자유와 민주를 기본으로 한 대한민국의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집단의 사병"이라고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4.19 혁명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2. 이승만의 하야와 과도 정부의 구성
4.19 혁명 이후, 이승만은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의 하야는 한국에서의 독재 정권 타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외무부 장관 허정이 이끄는 과도 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주요 각료와 자유당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국회는 3.15 부정선거 무효 및 재선거 실시를 결정하였습니다.

이후 내각책임제와 국회 양원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새 헌법에 따라 민 의원과 참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이 실시되었습니다.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이 집권하여 장면 내각이 시작되었습니다.

3. 장면 내각의 정책과 사회적 변화
장면 내각은 제4차 개정 헌법을 통해 3.15 부정선거의 주모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소급 법안을 마련하였습니다. 장면 내각은 정치 사회적 민주화와 경제 제일주의를 국정의 핵심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는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고 당시 악화된 경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내각은 도로, 교량, 댐 등의 국토 건설 사업을 추진하였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면 의원부터 도지사에 이르기까지 지방정부의 주요 직위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지방자치제를 처음으로 실시하였습니다.

4. 사회운동의 활성화와 요구 사항
장면 내각 시기에는 독재 정권으로 억압받았던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각종 규제가 완화되며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혁신 세력을 중심으로 교육, 노동, 통일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주요 요구사항으로는 3.15 부정선거의 책임자 처벌, 친일파 청산,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 등이 있었습니다.

통일 분야에서는 일부 학생들과 진보 세력에 의해 남북 협상이 시도되고 중립화 통일론 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경제와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통일의 기반으로 보는 선건설 후 통일 정책을 우선시하였습니다.

결론
4.19 혁명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하야와 장면 내각의 출범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사회운동의 활성화와 다양한 요구가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경제적, 정치적 안정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많은 도전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4.19 혁명의 정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앞으로의 사회 통합과 발전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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