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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관 관원들이 도선의 예언을 언급한 이유는 새로운 도읍지로 삼을 만한 좋은 땅을 골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무악, 한양을 후보로 두고 새 도읍지에 적합한 곳을 정하도록 하였다. 무악을 둘러보던 중 태조는 서운관 관원과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들은 풍수지리적으로 무악이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태조는 예언이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반박하며, 예언을 신뢰할 만한 사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이는 태조가 예언을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로 여기지 않고 깊이 있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의 새로운 수도를 정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천기누설이 언급되었다. 이 예언은 개경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조선 비기에 따르면, 서쪽에 공암이 있고, 단서가 새겨진 석벽이 있다는 내용이 있었으며, 이는 한양의 인왕산에서 발견되었다. 결국, 도선이 남긴 예언에 따라 조선의 도읍지가 한양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도선 비기가 실제로 도선이 남긴 기록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일부는 이성계가 남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예언이 너무 정확하게 맞았기 때문이다.
도선의 예언 외에도 여러 예언서들이 존재했지만, 현존하는 것들은 없다고 한다. 후대의 누군가가 유명한 승려인 도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언서를 작성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제기된다. 조선이 하늘의 뜻에 따라 세워진 나라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예언은 확실히 존재했으며, 그 내용과 저자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조선이 건국된 지 25년이 지난 1417년, 예언서에 대한 시선이 크게 변하게 된다. 태종 이방원은 예언서를 부정하고, 이를 사사로이 간직한 사람들에게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는 태종이 예언을 믿고 이용하던 태조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서를 부정한 행동으로 해석된다. 태종이 왜 이러한 명령을 내렸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 10년 전 살현이라는 승려가 벌인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
진주에서 간통 사건으로 체포된 승려 설현은 "승왕이 나라를 세워 태평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다. 태종은 이 발언을 듣고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승려가 왕이 된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조정 신료들은 그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태종은 그를 유배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이 사건은 예언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태종의 자비로운 처분은 이후 또 다른 예언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후 나타난 예언 중 하나는 "이씨의 사직은 30년 기억뿐"이라는 내용이었고, 이는 조선 왕조가 몰락할 것이라는 암시로 해석되었다. 이 예언은 임영이라는 인물이 소지하고 있었고, 그는 이 내용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이러한 예언들이 조선의 정치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상당했으며,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에 도전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조선의 예언들은 단순한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태조와 태종의 상황에서 예언은 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고, 동시에 불안의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역사 속에서 예언이 어떻게 해석되고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가 된다. 조선의 역사는 이러한 예언을 통해 왕조의 정체성과 권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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